(시)미소가 눈을뜰때-시인 배효철

나는 이렇게 두 사위를 맞이 하였다

배효철 (여산) 2013. 4. 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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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렇게 두 사위를 맞이 하였다.

내가 최씨네 집안에 사위가 된지도 28년째이다.

정작 처갓집에 찾아가 처음 인사를 드린 게, 그 5년 전이니 약 33년이 되었구나.

그렇게 해서 만난 인연으로 우리는 아이 셋을 낳아 기르매 보다 정성과 사랑으로

행복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주님의 따뜻한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쳤다.

우리 부모가 나에게 베푼 만큼이야 못했겠으나,

그런 대로 부모 노릇하며 아낌없는 세월을 보내니 이놈들이 커서

출가를 기다리며 줄을 세웠구나.

지금으로부터 2년 전쯤 작은 딸,수나가 한 건장한 사내를 데리고

 인사를 하겠다고 찾아온 적이 있다. 나는 이미 그때,

 이제 내가 33년 전에 화곡동 처가 집에 쳐들어가

 "댁에 따님과 사귀고 싶습니다."하고 경례를 부치고

허락 받았던 그때가 다가왔음을 느끼었다.

"자식들~ 그냥 줄 수는 없지. 내가 어떻게 키운 딸들인데..

음, 묘수가 있어야 할 텐데..."나는 생각하고 고민하며 사위를 맞는

조건들을 찾아보았다. 내 기분에도, 또 우리 딸들에게도 맞는 그러한 묘수에 조건!

얼마 후 나는 그 몇 가지 조건을 만들어 놓고,

 언젠가 사위 후보가 찾아와 인사를 하면 이 조건을 제시하며 얘기하리라.

"자네! 아직 우리 수나는 어리니, 친구로 지내면서,

서로가 인연이다 생각되면 내가 제시하는 조건을 해 갖고 오도록!

그동안 자네도 몇 친구를 사귀어도 보고, 또 우리 아이도

몇 친구 더 사귀어도 보고 말이다." 라고 했더니 눈이 둥그래지더군.

아직 큰딸인 우리 리나가 무슨 신호가 없으니,

좀 더 기다려 볼 심사지. 가능한 순서를 지키면서 보내야겠다 싶어서...

근데 우리 집사람 말로는 지가 서른 될 때까지는 추궁되지 말라고 한다는 거야!

왜 열심히 공부해서 이루고 있는 일을 두고, 일찍 시집가서 고생해야되는지 모르겠다 나?

이게 아직 임자를 못 만났구먼. 지가 눈까풀이 씌어야하지, 하곤 우리는 낄낄 웃곤 했지.

근무하는 학교 결혼한 선배선생님들이 재미있는 얘기는 쑥 빼고,

고생얘기 시집살이 얘기만 해 주는 모양이구먼, 하고 우리도 그냥 기다려 보기기로 했지.

어느 날, 집사람이 전화로 "자기 오늘 저녁 때 스케줄 어때요?

같이 소주나 한잔합시다." 하고 물어 와, "이 사람 뭔 일인가?"하고 "좋지!"라고 하면서

 "요즘 경기가 안 좋아 위로해 줄 모양이지" 하곤, 둘이 자주 가는

동네 오겹살 고깃집에서 자리를 깔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 우리 리나가 동네 누구누구 집 남자친구를 인사시키러 데리고 오겠다고

하니 언제가 좋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자기가 들은 얘기를 쭉 펼쳐 놓는데....., 이제 올 것이 왔구나!

내가 어떻게 키웠던! 또 어떠한 사랑으로 보살피고 교육하였던 간에, 나는 이제 보내야 한다.
그 날이 온 것이로다.
그리고 수일 후, 기대 속에서 동네 북경오리 요리 집에서 그 친구를 만났다.

우선 첫눈에 덩치도 크고, 남성다운 매력도 있고 해서 "괜찮겠군!"하면서 이모저모

살피며 나의 주특기인 소주로 공략하며, 질문하고, 한잔 더 권하고 하며...,
생각보다 분위기는 더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던 것 같다.
단지 자랄 때, 우리 딸이 맨 날 나보고 "아빠가 눈에 쌍꺼풀이 없어서

 저 눈이 예쁘지 못하다"고 툴툴했었는데, 아니 데리고 온 아이가

 나보다 눈이 더 작은 게 아닌가? 이게 웬 일 인 감? 그렇게 아빠를 구박하더니...

 에고 쯧쯧.. 그 봐 임마! 어째 아비하고 비슷한 놈을 데리고 왔네! 나는 마구 딸을 놀리며 웃어댔다. 하하하!

이제 나는 졸지에 사위 둘을 두 달 간격으로 맞이하게 됐다.

이게 또 무슨 인연인가? 나는 미국에서 살고있는 여동생 영희하고

 결혼을 한 달을 사이에 두고 올렸었는데, 이젠 내 자식들이 또 따라서 하는구먼,

 나는 겹치지 않게 하려고 네 살이나 차이를 두었건만, 이런 자식들

뭔 사건이 난 것도 아니고. 한 2년 지나서 보내려 하였는데,

두 째의 사돈 되실 어르신이 갑자기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서둘러 보내자고 허니,

또 저들이 이미 맘을 두고 있는 사이 이고 해서 별 수없이 보내어야만 한다.

이 또한 인연의 팔자이거니 하고.....

이제 둘 다 똑같은 사위통과시험을 보게 하고, 나의 사위로 받아 들여야 한다.

내가 고민하고 고민하며 생각했던 묘수의 우리 집 사위조건은,
-첫째; 건강진단을 교환할 것.
이유인 즉,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사랑 할 수 있어야 한다.

결혼 후 그 사람이 어디가 약하다고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서로 가 부족한 것을 알고 채우며 살아야 한다. 결혼 서약서에도 있는 것처럼,

병들 때나이다. 미리 알고 서로 보완 해 주는 사랑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키기를 바란다.

-둘째; 하루에 50분 이상 어떤 운동이건, 착실히 운동하겠다는 각서를 장인에게 제출할 것.
즉, 운동이야 백 번 주문해도 문제가 없다. 우리 딸들이 운동을 좋아하지 않으니

사위들을 두들겨서 같이 운동할 수 있도록 만들고, 그래야 내 손자들도 열심히 운동할 게 아닌 가.
다들 건강해야지!

-셋째; 미래 이력서를 제출할 것.
즉, 나도 인생을 살아 보았지만, 무엇을 크게 이룩한 것도 없이 허둥지둥 살아온 느낌이다.
뭔가 확실한 목표 의식이 부족해서 일까? 나는 그저 가족들의 따뜻한 삶의 보금자리를

잘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장남으로서 형제들에게나, 아비로서 자식들에게나,

별 한 것도 없이, 나대로 한답시고.. 그저 그렇게 살아왔다. 이제 나는 딸자식과 사위들에게

나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의 주문으로서 미래 이력서를 써 보게 하였다. 그것을 주문하였다.

이제 얼마 후, 우리 첫째 사위가 될, 이 창 호군.
둘째 사위가 될, 하 상 우군. 나는 그들을 아들로 삼았다.
내가 주문한데로, 첫째는 서슴없이 주문답안서 마치고 제출하였다.

 건강모두양호! 미래이력서 기대 해 볼만하군. 운동 열심히 하겠다고 했는데,

 그게 좀 걱정이다. 잘 못하면 금방 나 따라 올 것 같은데, 결혼하고 나면 바로 내가 관리에 들어가야겠다.

 넌 딱 걸렸어!

둘째도 질세라, 건강진단 같이했는데, 더 많이 세세하게도 했다.

꽤나 들었겠다만, 서로 건강을 확인하고는 항목 따져가며 항목별로 서로가 더 건강하다고 큰 웃음치곤 한다.

 근데 진단서 제출하고는 2,3번 항목이 도착하지 않아, 나는 둘째 딸한테
"얘! 상우군은 소식이 없냐?"
"아빠! 오빠가 어떻게 써야 할 지? 고민하던 데!"
"야! 고민할 게 뭐 있나! 마음에 있는 그대로 쓰면 되지! 아빠가 컨닝 시켜 줄 까? 창호 꺼"
"아니, 오빠가 열심히 쓰고 있나 봐!"

그 후로 몇 날, 제출서를 갖고 나타났다. 나름대로 자신의 포부와 삶의 기준을 제대로

세우고 A4용지를 두 장 가득히 채워서, 건강 각서 포함해서 잘 써 왔구나. 나도 흐뭇한 표정으로...
그리하여, 부모의 허락 하에, 두 짝이 성립이 되고 이루어지게 되었구나.
나는 이들 두 쌍 모두를 한자리에 모아서 인사를 하게 하고, 모두 함께 가족파티를 열었다.
2차 테스트에 해당하는 음주량측정 소주테스트와 노래방의 노래실력테스트를 실시하였으며,

 두 커플 모두 노래테스트는 우리부부보다 우수점수로 통과! 음주량측정은 역시 우리가 우수!

3차 테스트는, 광교산 행군이다. 일요일이면 찾는 광교산에 이들을 초대했다.

처음 주문 할 때, 집사람과 딸들은 "남자들끼리 올라갔다 내려오면 식사할 때

만나서 식사나 같이 하겠다"하던 사람들이 당일 날에는"오빠가 함께 가잔다"고 하며 따라나서네.

 어이쿠! 요것들 봐라!
함께 다니는 광교산 팀들과 함께,1개 소대를 끌고 끌려 다니며 형제봉에 올라, 힘들어하는

 딸들은 데리고 내려올까 했는데, 짓궂은 장 사장과 교육열이 좋은 임 사장이 우리 코스를 제대로

시켜야 한다고 떠들어대니, 나도 좋다! 우리의 힘을 보여 주겠다며,강행군했다.

딸들은 힘들다고 눈을 흘기지만, 저들끼리 손잡고 밀어주고 끌고 가며,

그래도 땀 뻘뻘 흘리면서 올라가는 모습이 "그래 이것이 인생이다"라고 나 혼자 뇌까리면서,

함께 다리에 힘을 보태었다. 비로봉으로 올라 가뿐 숨 몰아 쉬고 토끼 재로 해서, 돌아 내려왔다.

 마지막코스인 기쁨코스,우리의 즐겨 찾기 코스인 보리밥집의 "돼지바베큐와 동동주"를 함께 나누며,

이들에게 산행 후 즐거움을 음미케 하였다.

모든 테스트를 마치고,
어느 날 나는 이들을 불러모아, 이렇게 얘기하며 나의 허전함을 채웠다.

"너희들은 내 딸을 빼앗아 가는 도둑이 아니라, 나의 아들로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다.
"첫째는 장남으로, 둘째는 차남으로, 우리 종일이가 막내가 되었구나"라고 나는 말했다.

< 2004년 10월 큰딸 시집보내기 앞서서/너희들의 아빠 배 효 철 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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