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전국일주여행 11일차,5월 18일 (토) -제천관광 -> 수안보온천으로~

배효철 (여산) 2013. 5. 30. 14:34

 

 *5월 18일(토), 전국일주여행 11일차, -제천관광 잘하고 ->수안보온천으로~

 

 

- 오늘 토요일이라, 집사람 애청 "삼생이"안하니, 빨리 챙겨 쟘모텔으로 뺘져나와, 제천 제1경인 "의림지"로 향하였다.

 

의림지의 유래를 살펴보면,

 

삼한시대에 축조된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저수지로 본래 "임지"라 하였다.
고려 성종 11년(992)에 군현의 명칭을 개정할 때 제천을 '의원현' 또는 '의천'이라 하였는데, 그 후에 제천의 옛 이름인 '의'를 붙여 의림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축조된 명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구전에는 신라 진흥황 (540~575)때 악성 우륵이 용두산에 서서 흘러내리는 개울물을 막아 둑을 만든 것이 이 못의 시초라고도 하며, 그 후 700년이 지나 현감 "박의림"이 4개 군민을 동원하여 연못 주의를 3층으로 석축을 해서 물이 새는 것을 막는 한편 배수구 밑바닥 수문은 수백관이 넘을 정도의 큰 돌을 네모로 다듬어 여러 층으로 쌓아 올려 수문기둥을 삼았고 돌바닥에는 " 박의림"현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합니다. 호반둘레 약 2km, 호수면 158,677m2, 저수량 6,611,891m3, 수심 8~13m의 대수원지로 몽리면적은 289.4정보이며, 보수 당시 수구를 옹기로 축조한 흔적이 발견되어 삼한시대 농업기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현재는 수리시설보다는 유원지로서 그 명성을 더해가고 있는데 경승지로 호수 주변에 순조 7년(1807)에 새워진 '영호정'과 1948년에 건립된 '경호루' 그리고 수백년을 자란 소나무와 수양버들, 30m의 자연폭포 등이 어우러져 풍치를 더하고 있습니다. 특히, 겨울철 및 해빙기에 잡히는 공어(빙어)는 담백한 맛의 회 어로 각광받고 있는 명물이며, 순채는 임금의 수라상에 올릴 만큼 유명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분이며 가야금의 대가인 "우륵"선생이 노후에 여생을 보낸 곳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가야금을 타던 바위 우륵대(일명 제비바위, 연암, 용바위)와 마시던 "우륵정"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의림지의 소나무는 나무 하나 하나가, 오랜 역사와 함께 모두가 작품인 것으로, 나무를 한그루씩 보면서,연신 감탄을 자아내곤 하였다.

과연 우륵선생께서 저절로 음악이 살아 움직이며 탄생 할 수 있는 그러한 곳이었다.

 

-우린 아점을 해결하기위해, 내가 블로그에서 보아 두었던 이곳의 명물, 한방약채 한정식집으로 향하였다.

의림지에서 조금 북편으로 오르니,"성현약채락 한정식"집이 있어, 그곳에서 몸에 원기를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주문하였다.

 

 

 

 

 

 

->약채한정식으로 잘 먹고, -> 배론성지로 향하였다.

 

-천주교신자로서 배론성지의 유래를 알아 보도록 한다.

 

배론 성지는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로 천주교사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성지로 1801년 신유박해때 많은 천주교인이 배론 산골로 숨어들어 살았는데 그들은 옹기장사로 생계를 유지하였고 황사영이 당시의 박해상황과 천주교 신도의 구원을 요청하는 백서를 토굴 속에 숨어 집필한 지역이며 1855-1866년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성요셉신학교가 소재했던 지역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중의 한명인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의 분묘가 소재한 지역이다. 아울러 1866년 병인박해의 첫 순교자인 남종삼 묘소가 배론 성지와 인접한 학산 리에 있다.
근대에 이르러 1958년 원주교구에 속하여 원주교구장이 개발 착수하여 진입로를 비롯한 성지일원을 말끔히 정리하고 단장하였으며,

*  배론 이란 지명은, 골짜기가 배 밑 바닥 같다 고하여 한자 새김으로 주론(舟論) 또는 음대로 배론(排論)이라고도 한다.
* 백서 는,가로 62cm, 세로 38cm되는 흰 명주 비단에 한줄에 110자씩 122행 13,384자로 작성되었으며, 원본은 로마교황청 문서보관소에 보관중이라고 한다.

 

- 배론성지는, 성지순례나 피정을 많이 드리는 장소로, 단체나, 위탁, 개인피정과 소규모피정등으로 많은 교우들이 찾아와 기도를 드리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찾고자하는 사람은, ->제천시 봉양읍 배론성지길 296 (www.baeron.or.kr)로 찾으면 쉽게 찾을 수 있다.

 

 

 

 

 

 

 

 

                                                   * 잘 정돈된 배론성지에서 우리는 생미사를 봉헌하였다.

 

->성지를 나와서, 울고넘는 박달재를 찾았다.

 

우리 모임인 가야회에서도, 한동안 이 노래로 웃기던 얘기거리가 있다. 이 노래의 첫소절이 막혀 끝까지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형님과 그 노래를 가르치겠다고 큰소리 쳐대며, 목에 핏줄 올리던 장면이 아련하다.

"청둥산 박달재를 울고넘던 우리 님아~,.. 에,  청둥~산~, 첫소절에 실패하시던 황선두 형님! 여기 한번 오셔야 겠습니다.

이곳에는 종일 이노래가 울려 퍼지니, 차 한잔 하시면서 박달재 노래, 다 배우시기 바랍니다. 다음 야유회때 들어 보겠습니다.

 

 

 

 

 

 

 

-> 박달재의 애닯은 사랑 얘기의 전설을  알아보고 가야 할 듯하여, 알아보니,..

 

 

제천시 봉양읍과 백운면을 갈라놓은 험한 산을 박달재라 한다. 조선조 중엽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도중 백운면 평동 리에 이르렀다. 마침 해가 저물어 박달은 어떤 농가에 찾아 들어가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집에는 금봉이라는 과년한 딸이 있었다. 사립문을 들어서는 박달과 눈길이 마주쳤다.

박달은 금봉의 청초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을 정도로 놀랐고, 금봉은 금봉대로 선비 박달의 의젓함에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그날 밤 삼경이 지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해 밖에 나가 서성이던 박달도 역시 잠을 못 이뤄 밖에 나온 금봉을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선녀와 같아 박달은 스스로의 눈을 몇 번이고 의심하였다. 박달과 금봉은 금 새 가까워 졌고 이튿날이면 곧 떠나려던 박달은 더 묵게 되었다. 밤마다 두 사람은 만났다. 그러면서 박달이 과거에 급제한 후에 함께 살기를 굳게 약속했다. 그리고 박달은 고갯길을 오르며 한양으로 떠났다. 금봉은 박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사립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서울에 온 박달은 자나 깨나 금봉의 생각으로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금봉을 만나고 싶은 시만을 지었다.

 

  난간을 스치는 봄바람은
  이슬을 맺는데
  구름을 보면 고운 옷이 보이고
  꽃을 보면 아름다운 얼굴이 된다.
  만약 천등산 꼭대기서 보지 못하면
  달 밝은 밤 평동으로 만나러 간다.

 

과장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던 박달은 결국 낙방을 하고 말았다. 박달은 금봉을 볼 낯이 없어 평동에 가지 않았다. 금봉은 박달을 떠나보내고는 날마다 성황당에서 박달의 장원급제를 빌었으나, 박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

금봉은 그래도 서낭에게 빌기를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박달이 떠나간 고갯길을 박달을 부르며 오르내리던 금봉은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금봉의 장례를 치르고 난 사흘 후에 낙방거자 박달은 풀이 죽어 평동에 돌아와 고개 아래서 금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목 놓아 울었다. 울다 얼핏 고갯길을 쳐다본 박달은 금봉이 고갯마루를 향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박달은 벌떡 일어나 금봉의 뒤를 쫓아 금봉의 이름을 부르며 뛰었다. 고갯마루에서 겨우 금봉을 잡을 수 있었다. 와락 금봉을 끌어안았으나 박달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렸다. 이런 일이 있는 뒤부터 사람들은 박달이 죽은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슬픈 사랑의 얘기가 있는 곳, 박달재를 뒤로 하고 청풍문화재단지로 가는  길도에 있는  금월봉에 잠시 들렀다.

 

금월봉은, 작은 금강산을 닮은 작은 바위들로 어우러져, 요즘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한다.

 

 

 

 

->청풍호가 흐르는 청풍문화재단지를 찾아, 수몰될 뻔한 문화재를 모두 모아 전시되어 있는 대공원이었다.

 

청풍문화재단지는,

정부의 4대강유역 종합개발계획으로 충주다목적댐 공사가 1978년 6월부터 시작하여 1985년 10월준공되기까지 수몰지역내의 산재되어 있는 문화유산을 1983년부터 3년여에 걸쳐 1만 6천평의 부지위에 원형대로 이전 복원하여 1985년 12월 23일 개장하였다.

청소년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매년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으며, 지금은 8만 5천평의 규모로 확대 개발되어 우리시의 가장 대표적인 문화관광지로 발돋음하고 있습니다. 보물 2점(한벽루, 석조여래입상), 지방유형문화재 9점(팔영루, 금남루, 금병헌, 응청각, 청풍향교, 고가4동), 지석묘, 문인석, 비석등 42점과 생활유물 2천여점이 보관되어 명실상부한 옛 남한강 상류의 화려했던 문화의 산실로 자리잡고 있다.

 

- 이곳을 찾아오면서 네비가 가르쳐 준곳이, 정문이 듯 한데, 큰 주차장이 있기는 하나,아무도 없고 문도 잡겨 있었다. 이상 타! 하여

네비 탓으로하여 청풍나루를 찾아 가니, 그곳에 문화재 입구가 있었다. 아마도 청풍나루터를 찾는 사람이 많아 입구를 바꾼 모양이다.

 

-> 다음코스로 용하구곡 계곡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일기예보에 오후부터 내일까지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 무리하지 않고, 그동안의

긴 여정의 피로도 풀 겸, 제천 옆에 있는 수안보온천으로 가기로 하였다.

 

-> 한참을 달려 수안보에 오니, 비가 올 터세를 부리고 있어, 몇군데 들려 도 마땅치가 않아  옆사람들이 "좀 비싸더라도 편한 온천행"을 요구하여  "수안보상록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우리는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여행일정 마지막 밤의 회식을 어떻게 할 것인 가,하고 논의 한 결과, 언제가 와서 먹어 본 꿩요리로 택하였다.

 

 

 

 

 

 

 

상록호텔 부근을 어슬렁 거리다 보니, 맞은 편에 껑요리로 유명세가 있는 "해성정"이 있어 들어가, 꿩요리 샤브샤브코스 주문하고

허리 띠를 풀렀다. 그동안 11일간 전국일주대장정에 아무런 사고 없이, 건강하게 함께 따라 준, 집사람과 일부구간을 함께 한 모모에게도

감사하고, 우리는 쇠주 두루 나누면서, 그 동안의 일정의  얘기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우리는 기분 주체 못하면 바로, 찾는 게 노래방이다. 찾다보니 호텔에 클럽노래방이 있어, 근 시간반을 각자 십팔번으로 대결의 장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