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전국일주여행 3일차 - 진도 -> 해남으로~

배효철 (여산) 2013. 5. 25. 13:34

 

 * 여행3일 차, 진도에서  해남으로~ 


 

-> 5월10일 (금)  무인텔의 불편으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우리는, 다시는 이런곳에 올일도 없겠지만, 서로 퉁퉁 부은 눈두둥을

 서로 바라보며 툴툴거리기 경쟁해간다. 짐을 정리하고"삼생이"보고가는게 평일 일과이니 만큼,짐 정리하면서도 연신 나름 소음에 대한

원인분석하면서 서로 분석을 들이대곤 하였다.

미리 구한 진도의 여행안내 책자를 보고,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곳으로부터 선정하여, 제일 먼저 해군의 후예로서

->이충무공전첩비를 찾았다. 

 

 

 

 

이 충무공전첩비는  진도 앞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언덕위에 세워져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안내판이 있었고, 돌바위 언덕을 지나자

돌하나로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주민의 말씀을 듣고 보니 공과 정성을  많이 들인 조각으로 보이며,그 위에 비를 세운 듯 하다.

해군의 후예로서 거수 경례로 예를 갖추고 기념사진을 남겼다.

 

->다음 관광지로는, 우리나라 남화의 본거지인 "운림산방"으로 정하고 점찰산쪽으로 향하였다.

 이곳은 5대에 걸친 남화의 본고장으로 소치-미산-남농-임전 등, 남화의 터 인셈이다. 경치가 수려하고, 운치 또한 감동을 주는 곳이었다.

조선조 남화의 대가 인 소치(1808~1893)허유 선생의 거처하던 화실로서 "운림각"이라 하고, 소치의 스승인 추사 김정희 선생이 호를 붙여

준 것이라 한다.

이곳은, 1856년 추사가 셰상을 떠나자 소치는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첨찰산 아래 쌍계사 남쪽에다 자리 잡아 집을 짓고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내셨다고 한다.

요즘 취미로 그림을 배우는 사람으로, 옛 선조의 대 화가를 가까이 하는 듯 하여 감개 무량하였다.

 

 

 

 

 

 

 

아름다운 경치를 뒤로 하고, 시간에 아쉬움을 남긴 재 우린 다음 여행지로 떠났다.

 

-> "신비의 바닷길"로 간다.

이곳 바닷길은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리 사이에 약 2.8km 바다가 조수간만의 차이로 바다밑이 40여m 폭으로 물위로 들어나 바닷길이 열린다는데, 그신비로움이 있다.

이 신비는 1975년 주한 프랑스대사"피에를 랑디"씨가 진도관광을 왔다가 이 현상을 목격하고  귀국 후, 프랑스신문에 소개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다.

 

 

 

 

 마침 우리가 갔을 때에는 그러한 신비로움을 볼 수는 없었다. 조수간만의 때를 생각하지 않고 찾았기 때문이다.

그냥 바닷길을 저쪽편으로 바라다 보면서 그 현상을 추정하며, 신비의 바닷길을 신비롭게 묻어 둔채, 우리는 그곳을 떠났다.

 

->다음 코스로는 분성 배씨 23대손으로, 고려시대 배중손장군 사당을 지나칠 수 없어, 찾아 예를 갖추고자 하였다.

역사속의 배중손장군은

13세기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하고 광대한 제국을 세운 몽고는 1231년부터 7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해 왔다. 1232년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긴 고려는 이후 40여 년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강력한 항전을 했으나 몽고군의 무지막지한 침략에 전 국토와 백성들이 처참하게 유린당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270년(원종 11년) 6월 몽고에게 항복하고 개경으로 환도했다.

  이때 대몽항전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던 삼별초의 최고 지휘관 배중손 장군은 몽고 오랑캐에게 결코 항복할 수 없다며 강화도에 남아 항전을 계속한다. 이에 조정에서 강제로 삼별초를 폐지하고 병적을 몰수하자 배중손 장군은 고려 조정에 반기를 들고 왕족인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고 새 정부를 세웠다.

  이후 고려군과 몽고군이 여몽 연합군을 결성해 삼별초 진압을 강화하자 배중손 장군은 함선 1,000여 척을 이끌고 서해안 요지를 공략하면서 남행하여 본거지를 진도로 옮기고 장기항전의 태세를 굳혔다. 이러한 소식이 알려지자 전라도, 경상도 주민들과 멀리 개경의 관노들까지 이에 호응하여 동조했고, 삼별초는 진도를 향해 몰려오는 연합군을 맞아 전주까지 진출해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삼별초에 거듭 패하자 마침내 연합군은 1271년 5월 진도를 3면으로 에워싸고는 총공세를 퍼부었다. 화포, 화창 등 신무기로 공격해오는 연합군에 맞서 배중손 장군은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전사하고 말았다.
  배중손 장군을 잃은 삼별초는 제주도로 본거지를 옮겨 대몽항쟁을 계속했으나 1273년 마침내 평정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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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 굴포포구가 있는 곳에 고려시대 삼별포 장수 배중손을 배향하는 사당이 있다.

 

 사당은 배종손을 비롯하여 삼별초 병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당집을 짓고 정충사라 불리우며 위패가 봉안되어 

 매년 6월 15일 제향을하고 있다. 정충사는 1959년 처음 건립 하였으며 그후 재건축을 하였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마당에는 배씨대종회에서 건립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곳을 찾은 우리는 ,진도 앞바다에서 맹렬히 싸우신 배장군의 사당관리가 너무 허술하여, 가슴 한편이 아리하였다.

입구에 들어서니 대문이 바람에 흔들려 떨어져 옆으로 비슴듬히 누워 있었고, 주위에는 관리의 손길이 닿지 않았는지,

참으로 허술하게 방치되고 있어 당장이라도 진도군청을 찾아 혼줄을 내고 싶었다.

배장군님은 후손들을 야단치는 듯, 바다를 향하여 손짓하고 계시는 데, 나는 장군님 동상앞에 예를 갗추고 기념하였다.

->(진도군청에 4월25일자로 불편사항으로 관리부재를 신고하였습니다.)


 

-> 씁쓸함을 뒤로하고, 그 다음코스는 "남진 미술관"이 있어, 그림공부하는 사람으로 찾아보기로 하였다.

 ; 남진미술관은 서예가 장전,하남호선생이 사비를 들여 1989년 11열29일자 개관한 개인 미술관이다.

약800여평의 대지위에 100여평의 한국고유전통적 건축물로 본가와 영원관,온고관으로 세워져 있었으며,

전시품으로는 서예,동양화,서양화,조각도자기등 300여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곳 관리인의 친절한 안내와 소개등으로 좋은 작품을 많이 감상하고,여행을 하면서 참으로 훌륭한 인재들이 곳곳에서 배출되어

그 지방과 나라에, 문화의 뿌리를 냬리니, 그들의 역량을 감지하고, 나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게 되었다.

 

-> 해남으로 들어서자 마자, 해남공룡박물관으로 찾았다.

 

 

 

 

-> 이 곳,공룡박물관은 해남우향리에 위치하며 자연문화재로는 국내 최초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곳이라 한다.

          1996년 3월 25일공룡발자국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기초학술조사가 이루어지고

          1998년.10.17.  천연기념물  제394호 로 지정.

          2007년  4, 27. 공룡박물관으로 개관되었다.

전시실, 지상1층은, 우향리실로 우향리 발자국 화석의 발굴과정과 백악기 생태환경을 이해하도록 각종화석이 전시되어 있었고,

           지하1층은, 공룡과학실로 공룡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을 접할 수잇도록 공룡과학실-공룡실-중생대재현실-해양파충류실

                        - 익룡실-새의 출현실-거대공룡실-지구과학실로 구성되어 여러가지 공룡에 관한 자료들을 총집합되어 있어

                           공룡에 대하여 배우고자 하는사람들에게 좋은 학습장이 되어 있었다.

그외, 옥외 전시관은 공룡의 발자취를 직접 체험 할 수있도록 많은 자료물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나는 우리나라 해남땅에 이러한 방대한 공룡유적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뿌뜻한 마음을 갖게 되었고, 추후 손주들과도 한번 더 와 보리라

 생각하게 하였다. 

 

-> 해남에는, 저희집사람 절친이 있어, 그곳에 들러 집사람의 친구와 회포를 풀기로하고,해남 땅끝마을 부근에 있는

친구집으로 차를 돌렸다.

-해남 친구집에 도착한 우리는,친구의 극진한 대접과 한가한 지역인지라 누구에게도 방해가 되지 않는 곳이라 노래방까지 설치되어 있어

우린 그집에서 미니 리싸이틀을 열고, 곡차 한잔 나누면서 하루를 즐겁게 마무리 하였다.

 

->다음 코스는, 순천국제정원박람회장 으로~